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양 군도 (문단 편집) == 경제 == 사실 남양 군도는 [[태평양]]에 띄엄띄엄 널리 분포해 있다는 점 덕분에 군사적 가치는 높았으나 원주민의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시장을 제공할 수도 없었고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[[어업]]과 인광석, 코프라 외에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. 스페인과 독일의 식민 통치를 거치는 와중에도 이렇다 할 산업 발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, 일본의 기업가인 마쓰에 하루지[* 설탕왕으로 불리고 사이판에 일제 통치 시기에 세워진 동상이 여전히 남아 있다.]는 남양 군도가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한 땅이라 판단하여 사탕수수 재배 중심의 산업을 육성했다. 그래서 남양 군도는 일본 정부의 지원금 없이도 재정적인 자립을 이뤄낼 수 있었고 일제의 [[설탕]] 자급에 공헌했다. [[1921년]] [[11월]]에 마쓰에 하루지가 설립한[* 남양청이 [[1922년]]에 설립되었으므로 남양청의 설립보다 빨랐다.] 남양흥발주식회사는 [[남양청]]으로부터 [[사탕수수]] 사업 독점권을 부여받아 [[사탕수수]]를 재배했으며, [[녹말|전분]], 인광, 수산물 등을 생산하였다. 남양청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남양흥발은 세계상품인 설탕의 주요 생산기업이 될 수 있었다. 설탕 외에 [[바나나]], [[파인애플]], [[코코넛]], [[커피]]와 같은 다른 열대 작물도 재배했고 어업 또한 성행하였으며 생선 가공 공장들도 세워졌다. 코프라 역시 특산품. 남양무역은 해운업, [[야자수|야자]] 재배를 수행했다. 섬에 따라 각각 다른 가축을 키우며 축산업도 이루어졌는데 당시 남양 군도의 대부분은 [[돼지]]를 사육했으나 사이판에서는 [[소]]를, 팔라우에서는 [[염소]] 등도 길렀다. 또한 앙가우르 섬을 비롯한 남양 군도의 몇몇 섬들은 인광석이 풍부하여 인광석 채굴이, 팔라우의 Ngardmau주에서 [[보크사이트]] 채굴 등이 이루어졌다. 그 외에 공장들도 들어서서 [[숯]] 제조 [[공장]], 가다랭이 제조 공장, 파인애플 [[통조림]] 생산 공장 등도 나타났다. [[무역]]도 활발했는데 흑자를 기록했으며 1942년쯤 남양흥발은 [[동남아]] 지역까지 사업을 확장했고 20여 개 남짓의 방계회사를 거느렸으나 [[1944년]] [[미국]]의 공격으로 망했고, 이후 1954년 폐쇄 기관 지정이 해제되었으나 사업을 재개하진 못했다. 다만 방계회사 중 남양무역은 1950년부터 사업을 재개하여 현재까지 활동 중으로 주로 태평양 지역의 수출 대리점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. 한편 1914년 점령 이후 일본의 위임통치가 공인되기 이전인 1919년에는 조선인들의 [[소요]] 사태가 발생했다. 이 시기에 지역에 유입된 조선인 수는 대략 200명 이내로, 대부분 니시무라사의 직원으로 섬에 유입되었다. 아무튼 1919년 당시 남양 군도에서 조선인들은 열악한 [[음식]]과 주거환경, [[무더위]]로 인해 생활수준이 매우 낮았고, 이 때문에 [[폭동]]이 일어난 것이다. 이 폭동은 일본 제국이 남양 군도 통치 방식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정도로 파장이 컸는데, 일본의 남양 군도의 위임통치가 공인되기 직전에 일어나 일본이 태평양까지 확장하는 것을 경계한 서방(미국, [[영국]], [[네덜란드]] 등)은 일본 제국의 통치를 유심히 주시하던 상황이라 조선인들의 폭동은 자칫 '일본의 통치력이 부족하다.'는 인상을 주어 위임통치령 허가가 떨어지는 것을 좌절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. 이 때문에 세워진 것이 남양흥발주식회사이다. [[일제강점기]]를 배경으로 한 한국 소설 중에 '남양군도'라든가 '열대 섬으로 [[강제징용]]'이란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, 그 열대 섬이 바로 여기를 말하는 것이다. 대표적으로 하근찬 작가의 [[수난이대]] 같은 소설이 그 예. 작품에 나오는 [[한국전쟁]]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군인의 아버지인 한쪽 팔이 없는 주인공이 한쪽 팔을 잃게 된 젊었을 시절 일제에 의해 배 타고 태평양을 건너 끌려간 곳[* 형식상으로는 남양흥발주식회사가 소작농 등을 상대로 꼬셔서 데려온 것이라 강제로 끌고 온 것은 아니었다.]이 바로 이곳이다. 아무튼 1919년 이후에는 특별히 [[독립운동]] 분위기나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. 워낙 원주민의 숫자가 적었고 오히려 일본인의 숫자가 더 많았던 데다가 [[섬]]들이 워낙 널리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. 여담으로,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[[관광]] 산업이 발전한 지역 중 하나였다. 물론 지금처럼 [[비행기]]가 대중화되었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, 단기 관광보다는 사회 최상류층의 [[별장]] 정도의 포지션이었다. 남양 군도의 [[경제]]는 [[1930년대]] 후반기에 완전한 자급자족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. 남양 군도의 경제 발전 자체는 이주 일본인들을 위한 것으로, 일본인과 원주민 사이의 임금 차별 및 원주민들의 사업 제한과 같은 차별 문제가 분명히 존재했으나, [[미크로네시아]] 원주민들도 직간접적으로 경제 발전의 수혜와 [[도시]] [[직업]]의 수혜를 누렸다고 평가된다. 특히 종전 후 미국의 태평양 신탁 통치 시기의 경제 정책의 실패는 전쟁 직전 일본 시대의 호황기와 대비되었고, 결과적으로 노인들에게 일본 시대는 경제적으로 '황금기'였다고 기억된다.[* 출처: THE TYPHOON OF WAR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